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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키건, 잉글랜드 축구 선수, 1951~2026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뒤, 훗날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구세주가 된 인물

Josh Noble2026년 7월 25일834 단어원문 ↗

조시 노블

케빈 키건은 자신의 스타덤 등극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표현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크러프츠까지 올라간 잡종견이었다”고 썼다.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키건은 그 이상이었다. 그는 전염성 강한 열정과 전광석화 같은 플레이 스타일로 사랑받은 축구계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감독으로서 그의 과감하고 공격적인 접근 방식은 잉글랜드 축구를 세계적인 현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킹 케브’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함께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극적으로 근접하기도 했다.

뉴캐슬은 이번 주 “케빈의 영향력”이 “그로 인해 축구를 사랑하게 된 전 세계 팬들의 여러 세대” 속에 계속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프 케빈 키건은 1951년 돈캐스터 외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는 탄광에서 일하기 위해 뉴캐슬에서 이주해 왔다. 그곳에서 공장 노동자였던 케빈의 어머니 도리스와 만났다.

키건은 10세가 될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는 집에서 살지 못했지만, 이미 6세 때부터 공을 차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광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학교를 계속 다니라고 insist했다. 15세의 키건은 지역 주물공장에서 차 심부름꾼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이 너무 작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주말이면 축구를 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스컨소프 유나이티드는 1968년 그와 계약했고, 키건은 적은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여름 일자리를 구했다. 돈캐스터의 놀이공원에서 장을 만났고, 두 사람은 훗날 결혼해 두 딸을 낳았다.

키건의 스타는 곧 떠올랐다. 1971년 그는 빌 섕클리의 리버풀과 주급 50파운드에 계약했다. 데뷔전 12분 만에 골을 넣었고, 존 토샥과 짝을 이뤄 마치 텔레파시로 연결된 듯한 막강한 공격 조합을 구축했다. 키건의 두 번째 시즌에 리버풀은 잉글랜드 리그와 UEFA컵을 우승했고, 이듬해에는 FA컵도 차지했다. 그는 1972년 잉글랜드 대표팀에 데뷔해 주장까지 맡았지만, 잉글랜드는 1974년과 1978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키건은 이미 전국적인 유명 인사였다. 그는 브루트 애프터셰이브의 광고 모델이 됐고, 1972년에는 ‘It Ain’t Easy’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리버풀은 다시 리그와 UEFA컵을 우승한 뒤, 키건이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치른 마지막 경기였던 1977년 처음으로 유럽 챔피언에 올랐다.

함부르크로 이적한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버블 펌을 선보였다. 함부르크는 독일 리그에서 우승했고, 그의 두 번째 싱글은 독일 톱10에 진입했다. 그는 발롱도르도 2년 연속 수상했다. 훗날 그는 자신을 “두 번이나 발롱도르를 받은 선수 중 가장 평범한 선수”라고 표현하며, 성공의 비결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고된 노력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3년을 보낸 뒤 그는 유럽 최고 명문 구단들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사우샘프턴을 거쳐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향하며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결정적인 장을 열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 2부리그에 있던 뉴캐슬을 최상위 리그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바로 키건이었다. 그는 85경기에서 49골을 넣으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33세에 은퇴했다. 뉴캐슬은 그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해 리버풀과 친선경기를 마련했다. 경기는 2-2로 끝났고, 키건은 헬리콥터를 타고 경기장을 떠났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팬들은 눈물을 흘렸으며, 그중에는 앨런 시어러라는 13세 볼보이도 있었다.

‘스페셜 K’는 결코 감독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약 8년 후 2부리그 하위권에서 고전하던 뉴캐슬로 돌아왔다. 그는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이끌었다. 팬들은 그의 막힘없이 흘러가는 공격 축구에 열광했고, 감정이 풍부한 그의 인격에도 깊이 공감했다.

Keegan의 감독 경력은 1995/96시즌으로 기억될 것이다. Newcastle는 Manchester United에 승점 12점 앞서며 구단 역사상 첫 Premier League 우승을 향해 가는 듯했다. 그러나 Alex Ferguson의 United는 점차 격차를 좁혔다. 압박감이 커지자 Keegan은 생방송 TV에서 라이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그는 “지금 그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우승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요”라며 “우리가 그들을 이기면 정말 좋겠습니다. 정말로요!”라고 말했다. 결국 Ferguson의 팀이 승리했지만, 팬들은 Keegan의 가식 없는 열정에 공감했다. 그는 자신들과 같은 사람처럼 말했다.

그해 여름 Keegan은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인 1,500만 파운드에 Shearer를 영입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공격수였던 Shearer는 이후 자신의 어린 시절 응원팀에서 200골 넘게 득점했으며, 여전히 Premier League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Shearer는 Keegan이 세상을 떠난 뒤 “나의 영웅. 나의 감독. 나의 친구”라고 말했다.

Keegan은 몇 달 뒤 Newcastle을 떠났다. Fulham을 지휘한 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았지만, 웸블리 화장실에서 사임하며 짧은 임기를 끝냈다. Manchester City에서는 거의 4년간 감독을 맡아 2002년 팀을 Premier League로 복귀시켰다. 이후 Newcastle로 돌아가 마지막 18경기를 지휘했지만, 당시 구단주였던 유통업계 거물 Mike Ashley와 공개적으로 충돌하며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Keegan은 너무 많은 감독들이 이기기 위해 축구에서 “생명력을 질식시키는” 쪽을 택한다고 불평했다. 그것은 결코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공격 일변도” Newcastle에 대해 “역사는 우리를 호의적으로 기억할 것입니다”라며 “우리는 관중을 열광시켰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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