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한 ‘블래스터베이팅’은 이제 그만할 수 없을까?
이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다른 사람의 스마트폰 스피커 소리를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드물다

Jemima Kelly
최근 스페인의 한 호텔에 묵던 중 나는 무례한 의미에서나,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나 ‘불쾌한 각성’을 경험했다. 온갖 음식이 한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법한 전형적인 뷔페 저녁을 즐기며 앉아 있는데, 한 남자와 그의 아들이 내 옆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소년은(내가 보기엔 12살쯤이었다) 아이폰을 꺼내 올리브 오일병에 기대 세우더니, 러시아 TV 프로그램을 최대 음량으로 틀어놓고 음식을 입 안으로 마구 쑤셔 넣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아버지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식들을 담은 자기 접시를 태연하게 먹으며,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놀란 것은 단지 그 모든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나와 다른 식사객들에게 보인 무례함,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인 무례함(솔직히 말해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만이 아니었다. 이 성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아들의 행동에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나는 눈길의 노골성과 지속 시간, 빈도를 높여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 식당에서 그들을 노려보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 만족스럽게 신경 쓰는 듯했다.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 문제’인가?
분명히 누구도 특별히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적어도 런던에서는 요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다른 사람의 스마트폰 스피커에서 나오는 깡통 같은, 귀를 긁는 소리에 시달리지 않고 이동하기가 어렵다. 소셜미디어 영상, 유튜브 동영상, 시끄러운 휴대전화 게임, 음악,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상통화까지 온갖 소리가 최대 음량으로 뒤섞인 불협화음을 듣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다니는 편이 현명하다.
아니다. 헤드폰 없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행위를 둘러싼 금기(사회 규범의 중요한 수호자)가 이제 거의 사라진 듯하다.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오프콤이 2022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 성인의 46%, 13~17세 청소년의 83%가 공공장소에서 이어폰 없이 영상을 시청한 적이 있었다. (그 후 4년 동안 나는 이런 행동이 분명히 늘었다고 느꼈으므로, 이 수치는 아마 실제보다 낮게 집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일랜드에서는 문제가 워낙 심각해 국영 철도 운영사가 이를 적발할 경우 100유로의 벌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 짜증 나는 현상을 묘사할 새로운 표현도 생겼다. 영국에서는 “loudcasting”, “sodcasting”, “bare beating”이 선호되는 표현인 듯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은 미국에서 나온 “blasterbating”이다. 공공장소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한층 강조하기 때문이다. JBL이 2024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런 행동을 인정한 미국인은 영국인보다 다소 적은 35%였다. 하지만 미국인은 자동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고 대중교통 이용 시간은 훨씬 적으므로, 그럴 기회도 적다. 그래도 58%는 여전히 blasterbation을 “공공의 위기”로 여긴다.
물론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태도를 바꾸면 무언가를 더 이상 성가시게 느끼지 않을 수는 있다. 이후 며칠 동안 나는 늘 같은 모습으로 있는 그 소년과 아버지를 지켜보며, 그들에게 어느 정도 다정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자는 아들이 TV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자주 말을 걸었고, 소년은 언제나 상냥하게 대답했다. 물론 소년의 시선은 대개 화면에 고정돼 있었지만, 아이를 휴가에 데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짜증은 사그라든 반면, 공동체 의식을 잃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우리의 공공장소를 훼손하고 있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작은 기술 버블 속에 갇혀 X에서 둠스크롤링을 하고, 인스타그램에서 남을 부러워하며 스크롤하고, 지루함이나 깊은 성찰, 혹은 설마 낯선 사람과의 대화 같은 불편한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한다.
사람들이 반드시 더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추측으로는, 누군가에게 왜 영상을 큰 소리로 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하고 있다고 답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은 각자 헤드폰으로 다른 것을 들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예의나 에티켓을 조금이라도 없애야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저질 콘텐츠의 공세에 시달리지 않고 책에 푹 빠져 길을 잃을 수 있는 자유는 어떠한가? ‘블래스터베이터’들을 용서할 수는 있다. 그들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빌어먹을 헤드폰을 꽂으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아니, 더 급진적인 생각을 해보자. 아예 휴대전화를 치우라고 말이다.
jemima.kelly@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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